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의 저주/사례 (문단 편집) == [[쌍방울 레이더스]]: 해체 == 김성근 4년 재임: 1996년~1999년 삼성 감독에서 경질된 후 이제 야구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지던 김성근이 돌아오게 된 것은 김성근과 친분이 깊었던 [[일빠|일본통]] [[이용일]] 쌍방울 구단주 덕분이었다. 쌍방울 시절은 그의 팬덤에 의해 김성근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되었던 시기였다고 칭송되던 시절이다. 하지만 2016년 김성근 재임시절(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팀연봉총액이 리그 전체 1위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쌍방울 시절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헝그리 정신'으로 포장되었던 쌍방울 돌격대의 이미지가 많이 퇴색된 상태. 그래도 96년은 연봉 하위권이기는 했다. 1997년 모기업이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도 김성근의 계속된 요청으로 쌍방울은 전력을 강화하며 페이롤 1위를 찍었고, 결국 이것이 쌍방울 모기업에도 부담을 주었다는 평가다. 1997년 재정위기를 겪던 모기업 쌍방울은 결국 1997년 10월 14일 부도처리된다. 그러나 모기업이 부도가 났지만 김성근이 언플한 것처럼 모기업이 구단에 대한 지원을 거의 끊은 것은 아니었다. 1998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예산은 페이롤 1위를 찍었던 1997시즌에서 비해 20% 삭감된 선에서 결정되었다. 지나치게 높아진 페이롤을 줄이기 위해 고액연봉 선수들을 타팀으로 트레이드로 보냈다. 그러나 선수유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젊은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충원했다. 투타의 핵심인 김기태와 김현욱은 여전히 98시즌에도 쌍방울 소속으로 뛰었다. 이 둘이 트레이드된 것은 1998년 시즌이 끝난 후다. 이 와중에도 김성근 감독은 [[김성근/구설#s-2.7.11|김원형 빈볼 사건]], [[김성근/구설#s-2.7.10|마운드 높이 시비]] 등 지속적인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야구팬들의 비난을 받았고 팀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마지막 시즌인 1999시즌 쌍방울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쌍방울 구단은 외국인 용병으로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를 영입하는 등 나름 팀 재건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몸값 비싼 [[김기태(1969)|김기태]]와 [[김현욱(야구)|김현욱]]이 나갔지만 젊은 선수들을 대거 충원했다. 현대로 팔았던 [[김광림(야구)|김광림]]이 현대에서 방출당하자 다시 영입하기도 했다. 1999시즌 쌍방울이 2할대 성적으로 주저앉은 것은 김성근 체제 4년 동안 누적된 혹사와 마구잡이식 운용의 후유증이 곪아 터진 측면도 적지 않다. 1999시즌엔 남아있던 주축선수들이 줄줄이 줄부상을 당해 전열을 이탈하고 말았다. [[조원우(야구)|조원우]], [[조규제]], [[김광림(야구)|김광림]] 등이 줄부상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조원우는 1999시즌에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팀내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김성근 감독 특유의 '''강훈련'''을 받던중 부상을 당하여 시즌아웃되었다. 이후 조원우는 2000년부터 복귀하여 선수 생활을 계속했으나 다시는 예전만큼의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 부상은 조원우의 커리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김성근의 첫 외국인 용병이었던 두 투수는 김성근 용병 잔혹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두 외국인 투수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김성근 특유의 기싸움으로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는 등 불협화음이 일어났고, 투구폼 교정 등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시즌 후에도 2군 강등을 반복하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가능성을 보였고 쌍방울에서도 시즌 초반 호투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이유없이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불만으로 표출하며 훈련에 무단 불참했다. 이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직접 전화해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구단이 나서 중재하면서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아노는 시즌 시작 전부터 스프링캠프에 제외되더니 시즌 후에도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며 역시 좋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1998년 12월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는 [[김기태(1969)|김기태]]와 [[김현욱(야구)|김현욱]]의 현금트레이드를 승인하면서 쌍방울에게 구단 유지를 위해 1999시즌 전반기 66경기에서 최소 승률 3할을 맞추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전반기를 3할 승률로 마치기 위해 조바심이 나있던 김성근은 1999년 6월 18일 남은 다섯 경기를 모두 이겨야 전반기 3할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날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김성근 감독은 초유의 [[김성근/구설#s-2.7.10|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http://osen.mt.co.kr/article/G1109561297|#]] KBO는 김성근 감독에게 12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2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고, 쌍방울은 0.237의 승률로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치게 된다. 결국 쌍방울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출장정지 징계 중이던 7월 올스타전 기간에 그를 경질했다. 결국 역대 최다패와 한 시즌 최소 관중의 굴욕을 맛본 쌍방울은 2000년 2월 해체의 운명을 맞이, 3월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하며 인천으로 연고를 정하면서 전주와 군산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